제주 4.3사건 이란 제주도 역대 최대의 참사 발단 전개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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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연예

제주 4.3사건 이란 제주도 역대 최대의 참사 발단 전개 논란

by 요설남 2024.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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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서는 이 사건을 1947년 3월 1일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사건의 발단, 전개, 사후처리, 논란 등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4-3-사건-위령비
제주 4.3사건 위령비

 

 

제주 4.3 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 7개월에 걸쳐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건을 말합니다.

 

목호의 난과 함께 제주도 역대 최대의 참사 중 하나이며, 여순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보도연맹 학살사건,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기에 민간인이 억울하게 학살되거나 희생된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힙니다. 

 

여순-사건
제주4.3사건 진압명령거부를 시작으로 발발하게 된 여순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이런 여러 사건 중에 제주 4·3 사건은 사망자 숫자 자체를 비교하면 제1공화국 시기에 일어난 단일 사건으로는 6.25 전쟁 다음으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으로, 이는 당시 미군정과 그 이후의 대한민국 정부, 그리고 이를 상대한 남조선노동당 세력들 모두가 민간인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4·3이라는 명칭은 1948년 4월 3일에 발생했던 대규모 소요사태에서 유래하였으며,  2003년 정부에서 발간한 「제주 4·3 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서는 이에 대해 ‘제주도의 특수한 여건과 3·1절 발포사건 이후 비롯된 경찰 및 서청과 제주도민과의 갈등, 그로 인해 빚어진 긴장상황을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과 접목시켜 일으킨 사건’으로도 판단하고 있다.

 

1948년 최초로 치러진 제1대 국회의원선거인 제헌국회 5.10 총선은 투표율 95.5%를 기록했으며, 한국사에서 최초로 다당제를 정착한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역대-국회-의원-선거-방식-변화
역대 국회의원 선거의 특징 및 임기, 선거방식의 변천사 자세히 알아보기

 

 

남북협상파의 불참, 남조선노동당계의 훼방이라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역대 최고 투표율을 만들어 냅니다. 

해방 이후 제주도는 일본에서 귀환한 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및 식량 부족, 콜레라의 유행 등으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어려운 여건에 놓여 있었고, 미곡정책 등에서의 군정의 정책 실패는 군정에 대한 민심을 악화시키게 됩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47년 3·1절 집회 당시 경찰의 말에 아이가 치여 항의하러 모인 일반 시민에게 발포한 사건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전개한 총파업을 초래합니다.

 

 

미군정은 총파업의 원인을 경찰 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 및 이를 이용한 남로당의 선동으로 분석하였으나, 사후 대응으로는 후자에 비중을 두어 서북청년회를 파견하여 강경한 검거작전을 전개하게 됩니다.

 

조직이 노출된 남로당 제주도당은 1948년 4월 3일 ‘단독선거 반대’를 슬로건으로 경찰지서와 우익인사에 대한 습격을 자행하였고, 5·10 선거를 방해하여 무효화시킵니다.

- 결국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제헌총선이 치러지게 됩니다. 

정부는 사태 진압을 위해 1948년 11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중산간지역 전체에 대한 초토화작전을 실시하였으며, 작전 결과 중산간 마을의 95% 이상이 소각되었고,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동시에 해안 마을에서도 ‘북촌사건’과 같은 불법적인 처형이 이루어졌는데, 무장대 역시 마을을 습격하여 민가를 불태우고 민간인에 대한 살해를 저지르게 됩니다.

 

6.25 전쟁 기간 동안에는 예비검속을 명목으로 많은 주민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는데, 1954년 9월 한라산의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이러한 유혈사태는 계속되게 됩니다.

 

2020년 발간된 「제주 4·3 추가진상보고서」에 의하면 2019년 12월까지 4·3 위원회에 심의·결정된 민간인 희생자는 총 14,442명이었으며, 사망자 중 78.7%는 토벌대에 의해, 15.7%는 무장대에 의해 발생하였으며, 희생자 중 20.9%는 여성, 14.5%는 15세 이하 아동과 60대 이상 노인층이었습니다.

- 특히 초토화작전 시기(1948.10.11 ~ 1949.3.1.)에 전체 희생자의 67.2%가 발생하였습니다.

2003년 발간된 「제주 4·3 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사태의 책임에 대해 군·경을 비롯하여 선거관리요원과 경찰 가족 등 민간인을 살해하고 지도부가 북한 정권 수립을 지지함으로써 유혈사태를 가속화시키는 계기를 제공한 남로당 제주도당 주도의 무장대, 4·3 이전부터 도민과 마찰을 일으키고 제주도청 총무국장 고문치사 사건 등을 자행한 서북청년회, 초토화작전을 통해 대부분의 희생을 발생시킨 군 지휘부 및 계엄령을 선포하고 강경진압을 지시한 이승만 대통령, 사건 발발과 진압과정에 관련된 미군정의 책임을 모두 지적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제주도민들을 상대로 각 정치 집단들이 대부분 학살에 가담하거나 방관, 조장하였기 때문에 그 누구도 책임에 있어 자유롭지 못한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3 사건은 폭동적 시위진압을 시작으로 반군 진압을 명분으로 한 학살, 이념과 종교적 신념에 입각한 학살, 특정 지역 거주민을 대상으로 한 학살, 보복성 학살 등등 사실상 지구상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학살의 유형이 총집합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발단

제주도는 지리적으로 동북아시아의 요충지라는 특성을 지녀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하여 일본군 6만여 명이 주둔한 전략적 기지였으며, 8·15 광복 직후에는 일본군이 철수하고 외지에 나가 있던 6만여 명의 제주 주민들이 일시에 귀환하여 급격한 인구 변동을 겪게 됩니다.

 

귀환한 사람들은 직업을 구하지 못하여 생계를 꾸리기 어려웠고, 생필품 부족과 콜레라 발병으로 인한 수백 명의 인명 희생, 극심한 흉년과 미곡정책의 실패로 인한 식량난 등이 겹쳐 민심이 악화됩니다.

 

게다가 일제에 부역한 경찰들이 미군정하에서 다시 치안을 책임지는 군정경찰로 변신하였으며, 민생이 피폐한 상황에서도 군정관리들은 사리를 채우는 부정행위를 일삼는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가 부각되게 됩니다. 이처럼 복합적 요인이 혼재한 상황에서 1947년 이른바 '3·1절 발포사건'이 발생하여 제주 4·3 사건의 도화선 역할을 합니다.

 

1947년 3월 1일, 3·1절 28주년을 맞아 좌파 진영의 제주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의 약칭)이 도내의 곳곳에서 기념집회를 주최하게 되었고, 제주북국민학교에서 기념식을 마친 군중은 시가행진을 하며 가두시위에 돌입하게 됩니다.

 

그러던 과정에서 관덕정 앞 광장에서 구경하던 어린아이가 기마경찰이 탄 말에 차여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게 됩니다. 기마경찰이 그대로 가려고 하자 일부 군중이 돌멩이를 던지며 쫓아갔고,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이 군중에게 총을 발포하여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게 됩니다.

 

또한 관덕정 쪽에서 총성이 나고 피투성이의 부상자들이 도립병원으로 업혀 들어오자, 부상당한 동료 경찰의 경호차 도립병원에 있던 경찰 1명이 공포감을 못 이겨 소총을 난사하여 행인 2명에게 중상을 입히기도 합니다.

당시 조직이 노출되어 수세에 몰려 있던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이를 계기로 3월 5일에 3·1 사건 대책 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반경(反警) 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게 됩니다.

 

3월 10일에는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3·1사건에 항의하는 민·관 총파업에 돌입하여 3월 13일까지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에 달하는 166개 기관 및 단체에서 파업에 동참하게 만듭니다.

 

한편, 미군정은 사태가 심각해지는 양상을 보이자 3월 8일에 제임스 카스티어(James A. Casteel) 대령이 이끄는 미군정청·재조선미육군사령부 합동조사단을 파견하여 진상조사에 나서게 되는데, 당시 작성된 미군의 정보보고서에는 3·10 총파업에 "좌·우익이 공히 참가"하고 있으며,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단체에 동조자이거나 관련이 있는 좌익분자의 거점으로 알려져 있다"라고 기술하게 됩니다.

 

미군정은 이렇듯 제주도민의 경찰에 대한 반감과 이런 감정을 부추기는 남로당의 대중선동에 의하여 3·10 총파업이 증폭되고 있다고 분석하였으나, 그 대응책으로 경찰의 발포에 대한 과오를 추궁하여 민심을 수습하기보다는 좌익세력 척결에 주력하는 정책을 전개하게 됩니다.

 

전개

1947년 3월 14일 제주에 내려온 미군정청의 경무부장 조병옥(趙炳玉)은 3·1 사건이 일종의 폭동이며 다른 지방의 응원경찰을 대거 투입하여 물리력으로 무질서한 제주의 치안을 바로잡겠다는 뜻을 담은 포고문을 발표합니다.

 

3월 15일에는 파업 주모자들을 검거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여 3월 18일까지 약 200명이 검거되었으며, 이들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고문을 자행하였다는 논란도 일게 됩니다.

 

제주도의 총파업 사태는 3월 말에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으나, 경찰당국의 대량 검속이 진행되어 1948년 4·3 발발 직전까지 약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되었으며, 또 3·1 사건 이후 지역 주민과 경찰이 충돌하는 사건이 자주 발생하였는데, 1947년 3월의 우도사건과 중문리사건을 위시하여 6월의 종달리사건, 8월의 북촌리사건 등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는 한반도에서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미국 안을 통과시키게 되나, 이 안이 소련의 거부로 실현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대두되었고, 한반도가 영구히 남과 북으로 분단되리라는 우려에 좌파 진영뿐 아니라 우파 일부와 중도파까지 격렬히 반발하게 됩니다.

 

남로당은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강력한 투쟁의 일환으로 1948년 2월 7일을 기하여 전국에서 총파업을 일으키는 이른바 '2·7 구국투쟁'을 전개하였다. 제주에서는 2월 8일부터 여러 지역에서 시위가 벌어졌으며, 2월 말에 남로당 제주도당 임원들이 참석한 신촌회의에서 강건파와 온건파의 논쟁 끝에 12 대 7로 무장투쟁 방침이 결정됩니다.

 

3월에는 경찰에 연행된 청년 3명이 고문으로 잇따라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여 민심이 동요하게 되기도 합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를 전후하여 350명의 무장대가 도내의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하였고, 경찰과 서북청년회 숙소, 독립촉성국민회와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합니다.

 

이로 인하여 경찰 4명과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이 사망하였으며, 무장대는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 남한 단독선거 및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조국의 통일 독립, 반미 구국투쟁을 무장봉기의 기치로 내세우게 됩니다.

 

무장봉기 초기에 미군정은 이 사태를 경찰이 담당할 '치안 문제'로 파악하여, 미군정은 4월 5일 전남 경찰 약 100명을 응원대로 급파하고 제주경찰감찰청 내에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였으며, 제주도 도령(道令)을 공포하여 제주의 해상교통을 차단하고 미군 함정을 동원하여 해안을 봉쇄하기에 이릅니다.

 

4월 8일에는 제주비상경비사령관이 무장대에 대한 소탕전을 전개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하였고, 4월 10일에는 국립경찰전문학교의 간부후보생 100명을 제주에 파견하여 경찰력을 강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태의 원인에 대한 근본적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응원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힘으로 진압한다는 방침은 도민들의 반발을 사게 되어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게 되었고,  4월 17일 경찰력만으로 사태를 해결하는 데 한계를 느낀 미군정은 경비대 제9연대에게 경찰과 협조하여 진압작전에 참가하도록 명령하였고, 4월 18일에는 본격적인 진압작전에 앞서 무장대 지도자와 교섭하도록 지시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4월 28일에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金益烈) 중령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金達三)이 평화협상을 진행하여 72시간 안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할 것 등을 합의하였으나, 5월 1일에 우익청년단체가 일으킨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협상이 파기됩니다.

 

방화사건 직후 김익렬 연대장은 현장 조사를 벌인 끝에 우익청년들의 소행임을 밝혀냈지만 미군정은 이를 무시하였으며,  미군정은 오라리의 방화 현장을 지상과 공중에서 입체적으로 촬영하도록 하여 《제주도의 메이데이 May Day on Cheju-do》라는 기록영화를 만들었고, 이 사건을 무장대의 소행으로 조작하는 데 이용하게 됩니다.

오라리 방화사건 이틀 후인 5월 3일 미군정은 경비대에 무장대를 총공격하도록 명령하였고, 이로부터 경찰 중심의 진압작전은 경비대로 넘어가게 됩니다.

 

미군정이 강경진압으로 선회한 것은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제주도 사태를 조기에 진압하는 데 주력한 주한미군사령관 존 하지(John R. Hodge) 중장의 결정 때문이었는데, 1948년 5월 10일의 남한 단독선거에서 제주도는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결국 무효처리되었고, 미군정은 로스웰 브라운(Rothwell H. Brown) 대령을 제주지구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강경진압을 계속하면서 6월 23일에 재선거를 실시하려고 하였으나 이마저도 무산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5월 20일 경비대원 41명이 탈영하여 무장대에 가담하였으며, 6월 18일에는 화평책을 추진해 온 김익렬과 전격 교체되어 경비대 연대장으로 부임하였던 박진경 대령이 부하 대원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후 잠시 소강 상태에 놓였으나 1948년 8월 15일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9월 9일에는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문제를 지역 문제가 아닌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고, 그해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게 됩니다.

 

10월 17일 송요찬 제9연대장은 제주 해안선으로부터 5㎞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을 금지하고 이를 어기면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이라는 포고문을 발표하는데, 포고문에서 언급한 해안선으로부터 5㎞ 이외의 지점은 한라산 등 산악지역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해변을 제외한 중산간마을(표고 200m 등고선에서 표고 600m 등고선 사이의 지역) 전부가 해당하여 통행금지란 결국 거주를 금지한다는 의미였습니다.

 

10월 18일에는 제주 해안이 봉쇄되었고, 11월 17일에는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게 됩니다. 

이후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강경진압작전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어 마을의 95% 이상이 불에 타 없어지고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삶의 터전을 잃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산으로 들어가 무장대의 일원이 되는 피난민이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습니다.

 

 

진압 군경과 여기에 가세한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원들은 마을 주민들을 모아놓고 가족 중에 청년이 사라진 집안의 사람들을 '도피자 가족'이라 하여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이른바 '대살(代殺)'을 자행하기도 하였으며, 재판절차도 없이 주민들을 집단으로 사살하기도 하였습니다.

 

1948년 12월 말에 진압부대가 9 연대에서 함병선(咸炳善) 연대장의 2 연대로 교체되었지만 강경진압은 계속되었으며, 조천면 북촌리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400여 명의 주민을 총살한 이른바 ‘북촌사건’도 2 연대가 자행하게 됩니다.

 

또한 주민들은 무장대에게도 피해를 입었는데, 세화·성읍·남원 등의 마을에서는 무장대의 습격으로 민가가 불타고 주민들이 희생되기도 합니다.


1948년 12월 31일 계엄령이 해제되었고,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함께 선무작전을 병행하여 귀순하면 용서한다는 사면정책에 따라 많은 주민들이 하산하게 되었고,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적으로 치러진 데 이어 6월에 무장대 총책인 이덕구(李德九)가 사살되게 됩니다.

 

이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고 할 수 있었고, 이듬해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와 요시찰자 그리고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 검속되어 처형당하였고,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 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는데, 그 숫자는 약 30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禁足) 지역이 전면 개방됨에 따라 4·3 사건은 발발 이후 7년 7개월 만에 사실상 종결되었으며, 마지막 무장대원은 1957년 4월 2일에 생포되었습니다.

 

사건 사후처리 및 논란

사건 이후, 희생자들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요청으로 2000년 1월 12일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 공포되었고, 이에 따라 그해 8월 28일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발족하여 진상조사에 착수합니다.

 

위원회는 진상조사 결과, 제주4·3사건을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남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하게 됩니다. 

2000년 6월부터 시작된 사건희생자 신고 접수 결과 1만 4532명으로 집계되었지만, 미신고 또는 미확인 희생자가 있어 실제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편 군인 전사자는 180명 내외, 경찰 전사자는 140명이며, 당시 4·3 사건으로 인하여 사망한 우익단체(대동청년단·서북청년회·대한청년단·향보단·민보단·청년방위대·특공대·학생연맹 등) 회원들은 소정의 절차를 거쳐 국가로부터 국가유공자 및 유가족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2003년 10월 31일 진상조사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이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와 토벌대의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국가권력에 의한 대규모 희생이 이루어졌음을 인정하고,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기도 합니다.

 

또한 제주 4·3사건에 대한 공동체적 보상의 일환으로 4·3 평화공원조성사업이 진행되었고, 2008년 3월 28일 제주시 봉개동에서 4·3 평화공원이 개관하기도 합니다.

 

2014년 ‘4·3희생자추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으며, 2018년 제70주년 제주 4·3 희생자추념식과 2020년 제72주년 4·3 희생자추념식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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