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호 탄생 과정 이름 유래와 의미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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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연예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호 탄생 과정 이름 유래와 의미 뜻

by 요설남 2023.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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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북한, 한반도에 위치한 두 나라,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각자의 국호를 통해 역사, 이념, 정치적인 가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남북한 두 국가의 국호인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과 유래, 그리고 뜻과 의미, 이름 수립 과정 등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대한-민국-국기
대한민국 태극기

 

대한민국 탄생과 유래

'대한민국'의 국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년)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한국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모여 국가를 설립하고 독립을 선언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선택했습니다.
 
조선의 고종은 청일전쟁 이후 외세에 의하여 조선에 대한 이권 쟁탈전을 겪자 1897년 칭제(稱帝) 요청을 받아들여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다고 선포하게 됩니다.
 
이 국호에는 중국에 사대하고 책봉을 받던 왕조였던 조선의 이름이 부적합하다는 의견과, 고종황제가 밝힌 ‘우리나라는 삼한의 땅이고 매번 각국의 문자를 보면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韓)이라고 하였다’는 생각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1910년 일제는 한일병합을 공식 발표하면서, 대한제국이라는 독립 국가를 대일본제국의 하나의 지역으로 격하시켜 국호를 ‘조선’이라 칭한다고 공포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우익 계열의 민족주의자가 국호로써 ‘대한’을 선택한 이유는 ‘조선’이 중국에 사대하던 봉건 왕조의 이름이자 일제 식민지의 칭호였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흘러 1919년 만주 하얼빈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대한민국이란 국호가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나라를 꿈꾸었습니다. 이러한 이념과 목표를 반영하여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선택했습니다.
 
3.1 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 4월 10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역에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임시의정원이 개원을 하였고, 더 이상은 황제의 나라가 아닌 국민이 주인인 나라라는 의미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이는 황제의 나라에서 국민의 나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뜻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 진영이 민족의 독립국가 건설을 구상할 시기에 다양한 국호들이 논의대상이 되었습니다. 특히 독립국가의 방향성을 달리 한 좌·우익 세력은 ‘대한’과 ‘조선’이라는 명칭을 두고 대립이 심했습니다. 
 
하지만, 망한 나라인 대한제국의 '대한'을 가져온 것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라고 반론하며 대한민국의 국호를 결정하게 됩니다. 
 

 
'대한'은 삼한에서, '조선'은 단군조선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우익 계열은 '대한'을 좌익 계열의 사회주의는 '조선'이란 이름을 선택하게 됩니다. 좌익 계열의 사회주의자는 처음에는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나 1923년에 별도의 노선을 걷게 되면서 일반 민중에게 더 친숙한 '조선'이라는 이름을 선택하게 됩니다.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되며 공식적으로 국가로 정립됐습니다. 헌법 제정 이후 대한민국이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국가로서 확립되었습니다.
 

제헌절-유래-역사적-의의
제헌절의 유래와 역사적 의의 자세히 알아보기

 

대한민국 국호의 의미와 탄생 과정

"대한"은 민족의 역사와 정체성을 나타내고, "민국"은 국가를 나타냅니다. 이는 민주주의 원칙과 국민들이 함께 구성하는 국가를 상징합니다.
 
‘민국’과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공통적으로 ‘국민(인민)이 통치하는 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뜻에서 근본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하지만 민족해방운동이 좌우로 분열되면서 각각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또한 민족주의 계열은 민족국가를 최종 목표로 보기 때문에 ‘대한’ 혹은 ‘조선’이라는 민족적 칭호는 절대적 중요성을 지니게 됩니다.

반면 사회주의 계열은 국가는 궁극적으로 무계급 사회로 변화하면서 소멸할 기구로 간주하기 때문에, ‘대한’이나 ‘조선’ 등 민족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칭호보다는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의 단계를 지칭하는 칭호를 더 중요시하는 성향을 보이게 됩니다.

‘민(民)이 국가의 근본’이라는 동양의 전통적인 민본주의 정치사상에 바탕을 둔 ‘민국(民國)’이라는 단어는 조선 후기에도 사용됩니다.
 
대한제국 시기의 민간단체와 언론에서는 ‘민국(民國)’을 국가의 의미로 사용했는데, 당시 프랑스의 정식 국호의 ‘republic’을 민국(民國)으로 번역한 것을 보아 여기서 민국은 왕국이나 제국 같은 군주국에 반대되는 ‘국민이 통치하는 공화 정체’를 의미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명칭은 언론에서 비공식적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국호 채택은 먼저 수립된 중화민국의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 1911년 중국은 신해혁명을 통해 청을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탄생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신해혁명을 이끈 쑨원(孫文)은 서구 공화국의 한계를 극복하고 민(民)의 주권을 나타내기 위해 ‘공화국’이 아닌 ‘민국’의 명칭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출범으로 ‘대한’과 ‘민국’이 하나의 국호로 통합되기에 이르게 됩니다. 
 
해방 직후 좌익 계열이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자, 우익 계열이 그에 대항한 ‘대한민국’을 내세우게 됩니다. 

1946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 휴회할 무렵부터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해 온 이승만 계열은 대중 사이에서 임시정부의 권위를 의식한 ‘대한민국’을 국호로 고수했습니다.

반면 대한민국의 정치적 저작권자라 할 수 있는 김구와 임시정부는 단정에 결사반대했고 대한민국이란 국호에도 반대하게 됩니다.

한편 단일정부 세력이면서도 이승만과 대립한 ‘한민당’ 계열은 처음에는 ‘고려’를 국호로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이 단독정부를 지지하면서 국호 논쟁에서 이승만의 뜻이었던 ‘대한민국’에 힘이 실리게 되었고, 결국 1948년 총선거에 따라 구성된 제헌국회가 헌법을 제정하면서 ‘대한민국’이 국호로 결정되게 됩니다.

이처럼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에는 자주독립의 민주공화국을 세운다는 취지의 임시정부 세력과 통일 독립 국가를 지키려 했던 김구의 의사가 국호 수립과정에서 배제되었다는 안타까운 역사가 있으며, 이승만의 의도대로 단독정부가 수립되면서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본래 의도와 달리 분단국가의 국호로 시작하게 됩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탄생과 유래

 

북한-국기
북한 국기

 
 
1923년 좌익 계열이 임시정부에서 분리되면서, 좌익 사회주의자들은 ‘대한’이라는 칭호를 버리고 민중 사이에서 널리 쓰이고 있었던 ‘조선’을 선택하게 되고, 1948년 9월 9일, 북한 지역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이 공식적으로 선포되게 됩니다.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에는 코민테른(Comintern)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한 한반도에서의 사회주의 역사가 담겨있습니다.
코민테른(Comintern)은 공산주의인터내셔널(공산주의노동자협회),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적인 협력을 추진, 지휘하는 조직을 말합니다.

1920년 코민테른(Comintern) 제2차 대회에서는 식민지에서 벌어지는 민족해방운동에 대하여 식민지 사회주의자들의 당면 과제를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으로 규정하면서 민족부르주아지와 협력할 것을 권고하게 됩니다. 이는 자본주의를 촉진하기 위한 혁명으로, 사회주의자들이 먼저 부르주아민주주의를 이룩하여 신속히 사회주의로 이행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1925년 창당한 ‘조선공산당’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단계의 ‘인민공화국’을 구상하게 됩니다.
한편 1930년 이후 중국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펼친 주요 세력에는 난징의 ‘임시정부’, 화북의 ‘연안파’, 만주의 ‘항일유격대’가 있었는데, 이 중 항일유격대는 중국공산당 중심 동북항일연군에 참여하면서 1936년 ‘조국광복회’라는 민족통일전선 조직을 결성하게 됩니다.

이들은 독립적 ‘인민정부’를 강령으로 삼았는데, 여기서 김일성은 조국광복회의 결성을 실질적으로 추진하는 임무를 담당했으며, 1938년 조국광복회가 와해된 이후 김일성은 박헌영이 이끌던 조선공산당의 북한지역 분국인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창설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맡기도 합니다.

연안파는 1940년대 화북의 연안 일대에서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해 중국공산당과 항일연합전선을 펼쳤으며, 조선독립동맹은 마오쩌둥(毛澤東)의 신민주주의에 영향을 받아 ‘조선민주공화국’을 지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외세에 의해 일제 강점기 해방이 이루어지면서 통일독립국가 건설과 국호 선정에 대한 논의는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이후 미국과 소련의 관계에 따라 수많은 정치 세력에서 다양한 국호가 논의되었지만, 이들은 모두 ‘적당한 시기’에 통일독립국가가 될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일본의 패배와 국제적인 압력으로 인해 일본은 대한민국에서의 지배를 포기하게 되었고,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광복을 선언하게 되는데, 남한과 북한은 이에 따라 각각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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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이후 정권의 변화와 광복절의 유래와 의미 자세히 알아보기


해방 직후, 우익 민족주의 계열의 ‘대한민국’과 좌익 사회주의 계열의 ‘조선인민공화국’이 다양한 국호들 중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냈지만, 군정을 선포한 미국은 임시정부와 인민공화국 모두 정부로서의 자격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중국, 미국, 영국은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킨다는데 합의했고,

1945년 미국은 “북위 38선을 경계로 미소 쌍방이 일본군으로부터 항복을 받는다.”는 연합군 명령을 발령했으며 소련은 이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1945년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는 한국인의 통일임시정부를 미, 영, 중, 소 4 대국이 최장 5년간 ‘신탁통치’한다는 방안이 결의되자 우익은 신탁통치 방안에 극렬히 반대했지만 좌익은 결의안을 지지하며 통일임시정부수립에 중점을 두게 됩니다.

이때 좌익에서는 국호로 기존의 조선공산당의 ‘인민공화국’과 더불어 연안파가 창당한 조선신민당이 ‘민주공화국’을 제시했으며, 민주와 인민을 합친 ‘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등장했는데, 이 명칭은 ‘인민공화국’과 혼용되다가 북한 지역의 국호로 점차 자리 잡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47년 미국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발표하면서 미소 대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같은 해에 미소공동위원회는 남북의 각 정당과 단체로부터 통일임시정부의 국호에 대한 자문을 받게 됩니다.

남한에서 활동하던 조직인 ‘한국민주당’ 중심의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는 ‘대한민국’, 좌익계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조선인민공화국’을 국호로 제시하였고, 중도파 주도의 시국대책협의회는 좌우 정치 세력의 합의점을 찾아 제3의 칭호를 모색하면서 ‘고려공화국’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북한에서 활동하던 조직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호로 제시했는데, 남북의 좌익 사이에서는 처음에 남조선노동당과 민족주의민족전선이 내세운 ‘인민공화국’과 북조선노동당과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 내세운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립이 심화되어 갑니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남북 각각의 단독정부 수립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미군정이 좌익 계열을 압박하면서 주요 좌익 인사들이 북으로 넘어가게 되고, 결국 남로당의 인민공화국은 남한에서의 국호 선정 논의에서 제외되면서 북한에서는 ‘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자리를 양보하게 됩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호 의미와 과정

"조선"은 한반도의 고대 이름으로, 민족적인 정체성과 민족주의를 강조합니다. "민주주의"와 "인민공화국"이 결합되어 북한의 정치체제와 이념을 나타내며, "민주주의"는 이상적으로 국민들이 정치적으로 참여하고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1945년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이 선포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통일정부의 국체를 놓고 경쟁하게 됩니다. 

1946년 북로당 창당 전후로 ‘민주주의인민공화국’ 칭호가 대두되었고,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남로당의 ‘인민공화국’과 경쟁합니다.

1947년 분단 위기가 고조되고 북한이 헌법 제정에 돌입하면서 남로당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했고 인민민주주의헌법 초안에 국호로 명시되었고, 이후 1948년 최고인민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국호로 최종 확정되게 됩니다.
 
1950년 6월 25일 분단 위기는 결국 한국전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전쟁은 북한의 남한 침공으로 시작되었고 유엔군의 개입으로 국제 갈등으로 확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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